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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괴담

스승시리즈 - 무덤

레무이 2017. 1. 16. 19:17

덥다.

견딜 수 없어져서 상의를 벗어, 허리에 묶었다.

한숨 돌리며 산길을 돌아본다.

숲길이 여러 번 꺾어지면서 산자락으로 이어져있다. 아래쪽에 방금 내린 버스 정류장이 보일까 싶었지만, 키가 큰 삼나무 숲에 가려져버렸다.

오른 손에 꽉 쥔 종이가 땀으로 연해져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집을 나올 때 오늘은 추워질 것 같다고 생각해 그 나름의 복장을 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강한 햇볕과 산길의 경사가 평소 운동부족인 신체를 뜨겁게 만들었다.

“좋았어.”

어차피 혼자다. 누가 재촉하는 건 아니지만 빨리 움직이려고 하였다.

발을 내딛는다.

그 때, 멀고 높은 하늘로부터 물줄기가 하나 뺨에 떨어졌다. 놀란다.

산 날씨는 변하기 쉽다고 하지만,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도 없다. 하늘을 나는 새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뺨을 닦는다.

대기 중의 수분이 여러 물리현상의 우연을 거쳐 결집되어 떨어진 것이겠지.

문득, 이렇게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다른 한 명의 자신이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근 이런, 자신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마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때가 가끔 있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이건 이인증(자기자신이라는 감각이나 신체의 일부가 자기의 것이라는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하는 병증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어.

신기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조금 신기하지만 어차피 그냥 물방울일 뿐이니까.

그런 것보다는 일부러 이런 산골짝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

빨리 가자.

왜 그러는 거야.

멈춰 서서는.



이런 하찮은 일에 왜 마음을 빼앗기는 거지?

무의미하다.

생각해봤자 분명 의미 따위는 없다.

그래도 너는 기다린다.

누군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것을

“.....라는 걸, 알고 있나”

그리고 일상 바로 옆에 있는 기묘한 세계를 훔쳐보는 것을.

눈에 보이지만,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 본 문을 여는 것을.

그렇지만 알고 있다.

지금 그것은 무의미하다.

자, 나아가자. 아무리 기다려도, 그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대학 3학년의 겨울이었다.

오컬트 쪽의 스승이 없어지고 나서야, 겨우 그것을 자신 안에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나는 스승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한 장의 지도를 건네받았다. 시판하는 것이 아니다. 반 정도는 손으로 쓴 것이었다.

“한 번 가보는 게 좋아.”

다른 손님이 없는 찻집은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느낌이 나 있는 것이 불편했다.

“뭡니까, 이거.”

눈에 띄는 표시가 되어있는 지도를 쳐다보며 물어보는 나에게, 그는 구겨진 넥타이의 끝을 만지며 이야기했다.

“무덤이다.”

피안이 지나버렸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운터의 마스터와 마주 앉아 제스처로 물을 부탁했다.

누구의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금세 알아챘기 때문이다.



카나코씨라고 하는, 스승의 스승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나는 스승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녀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아는 사람인 것과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녀의 사진 한 장 본 적이 없었다.

사람됨은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도, 내 안에 있는 그녀는 윤곽뿐인 존재다.

무덤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좀 더 비현실적으로 저 멀리에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바람은 건조했다. 이제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하늘 아래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도를 다시 한 번 펼친다. 목적하는 곳은 좀 더 산 위쪽인 것 같았다.

계속 올라가자 곧 포장도로가 없어져, 바퀴 자국이 파여있는 험한 길이 되었다. 도중, 맞은편에서 경트럭이 왔기에, 산 쪽에 바짝 붙어서 피했지만, 그 경트럭 한 쪽 타이어를 중앙의 솟아 오른 부분에 걸치듯이 달리고 있었다. 차체가 기울어 있어 불안정해 보여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파인 두 개의 바퀴 자국에 맞춰 달리다보면 가운데 파여 있지 않은 부분에 차체의 밑바닥이 긁히는 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것도 지방의 풍습과 삶의 지혜인가.

나는 그 길 솟아오른 부분의 한가운데에 올라가 걸었다.

해안 측에서는 맞은 편 산 중턱에 펼쳐져있는 계단식 밭이 보인다. 단풍이 물드는 계절은 끝났지만 공기가 맑아서, 상쾌한 계곡의 풍경을 저 멀리까지 볼 수 있다.

좀 더 있으면 눈이 나무들을 화장시켜주겠지.

땀을 흘리면서 계속 걷자 갈림길이 나온다. 한 쪽에는 명소로 알려진 폭포가 있다고 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간판이 있었다. 뭐시기라고 하는 폭포. 읽지 못하는 한자였다.

지도 대로다. 폭포가 없는 쪽으로 가야한다. 그게 조금 유감이었다.

멀리서 산비둘기의 울음이 들린다.

물통의 물로 목을 축이며 계속 걷자 드디어 거기에 도착했다.

산의 경사면을 올라간 곳에 세워져 있는 간소한 묘비. 전망이 좋은 곳이다.



아래에는 산기슭의 집락과 그 가운데를 흐르는 강이 가는 신체를 구불거리는 뱀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나무뿌리를 손잡이 대신으로 하여 거기에 올라,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그에 답하듯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발 디디기도 좁은 곳에 단 하나 자리 잡은 이끼가 낀 묘비. 그 양쪽에는 꽃을 바치는 죽통이 있고, 시든 붓순 나무가 담겨 있었다.

스승도 여기에 참배하러 왔던 적이 있는 걸까.

검게 변한 공물의 흔적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등에 진 륙색을 끌러, 선향을 꺼낸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금세 손을 흔들어 끈다. 그리고 그것을 든 채로 묘비에 다가갔을 때, 나는 움찔하고 멈춰 섰다.

어?

뭐지 이건.

금세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예상도 못했던 것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 의미가 뇌에 도달할 때까지 묘비를 응시했다.

점점 심장의 맥박이 빨라졌다.

어? 어? 어?

기억의 열쇠가 소리를 낸다. 반쯤 간과했던 위화감의 정체가 연쇄하듯이 형태를 이뤄낸다.

그럼 그건? 그럼 그때는?

너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하나하나 정리를 하도록 하자.

선향의 향이 퍼지며 흔들흔들 불안정한 과거로 이끌린다.

너는 화를 낸다.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에게. 그런 삶의 방식을 살았던 그 사람에게.

너는 슬퍼진다.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그런 삶의 방식을 살았던 그 사람이.

손에서 선향이 떨어진다. 스니커의 재봉선을 따라 개미가 한 마리 기어오르고 있다.

예쁜 색의 날개를 가진 새가 늘어진 나무 가지에 멈춰있다. 어딘가에서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눈물이 한줄기 공중에 떨어져간다. 

그리고 너는 결국 상냥해진다.

“그 바보”

그래.

그 바보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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