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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괴담

스승시리즈 - 화장실

레무이 2017. 1. 16. 19:28

대학 1학년의 봄이었다.

휴일에 나는 혼자 시내로 나가 백화점에서 자취생활을 위해 필요한 잡다한 것들을 샀다. 계산을 한 후에 서점이라도 들렀다 갈까라고 생각하면서 화장실을 찾는다.

천장에 달려 있는 남, 녀 마크에 의지해서 어슬렁거리다가, 이윽고 구석 방향에서 마지막 화살표를 찾아냈다.

골목을 돌자, 평평한 벽에 둘러싸인 통로가 있는데, 거기에 도중에 몇 번이고 길이 꺾여 있어 결국 화장실에 도착할 쯤 되자 사람의 기척이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시끌벅적한 특유의 소란함이 저 멀리 사라지고 내 발소리만이 크고 시끄럽게 울렸다.

문득, 스승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백화점 4층의 화장실에서, 나온다더라.’

오컬트 스승이 말하는 것이다. 물론 바퀴벌레나 그런 게 아니겠지.

나는 여기가 4층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좋았어, 딱 좋군. 확인해주지.”라고 생각한다.

확실하게 스승은 이런 말도 했다.

‘4층 장애인용 화장실에서 말야,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어야할 텐데 가까이서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 목소리는 작아서 뭘 말하는 건지 듣기 힘들지. 두리번거리기만 해서는 안 돼. 작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거다.’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통로를 지나자 여성용과 남성용 마크가 박힌 벽의 앞에, 휠체어 마크가 있는 문이 있었다. 장애인용 화장실이다.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크림색의 손잡이를 옆으로 당기자 문은 큰 힘을 가하지 않아도 부드럽게 열렸다.

팟하고 빛이 들어온다. 자동 센서인 모양이다. 안쪽에 들어가, 문에서 손을 떼자 자연스럽게 닫힌다.

안쪽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다. 보통 화장실의 크기와는 많이 다르다. 입구에서 정면에는 양변기가 있고, 우측에는 세면대가 있다. 그 세면대의 상부에 설치되어있는 거울을 보고,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거울 바로 정면에 서있는데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슴팍 정도가 보일 뿐이다.

잘 보니 거울은 앞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과연, 휠체어를 탄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상정해서 낮은 위치에서 맞은편이 되도록 되어있는 것 같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울 안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거울이 보이는 것이 잘 모르는 누군가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거울에서 눈을 돌리고, 변기에 다가간다. 손잡이가 벽에 붙어있고 벽 반대 쪽에는 바닥에서부터 튼튼해 보이는 파이프가 나와 있었다.

꾹 하고 무게를 실어 손잡이와 파이프를 양손에 잡으며 몸을 반전시킨다.

착 하고 변기 위에 앉는다.

조용하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진동만이 전해져온다.

심령 스팟이니까 매일매일 ‘나오는’ 건 아니겠지. 심지어 이렇게 밝은 곳이고, 거기다 한낮이니까.

유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안심한 나는 기왕 앉은 김에 바지를 내리고, 용무를 보았다.

물을 내리는 버튼은 뭐지?

벽 측을 살펴보자, 붉은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잘못해서 누를 뻔하였지만, 멈춘다.

‘긴급호출’

그런 문자가 쓰여 있다.



위험하다. 긴급 시에 호출을 하는 버튼인 것 같다. 헷갈리는 곳에 두지마, 라고 불만을 토할 뻔했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납득이 간다.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을 때의 버튼이니까, 손이 닿는 곳, 더불어 눈에 띄는 곳이 아니면 안 된다.

‘세정’의 버튼을 그 근처에서 찾아, 누른다.

쏴아라고 물이 흘러내려가는 소리가 난 후에 다시 조용한 시간이 돌아왔다.

그래야 했는데……

일어난 순간 내 귀가 뭔가 이변을 알아챘다.

……소근……소근……소근……

뭔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순간, 분위기가 변한다.

무겁게 끈적끈적한 분위기로. 

나는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움직여 실내를 둘러본다.

천장, 조명, 환풍기, 문, 세면대, 거울, 벽, 손잡이, 바닥.

아무 변화도 없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소근, 소근이라고 하는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계속된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그렇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나는 그 소리의 정체가 알고 싶었다.

‘두리번거리기만 해서는 안 돼’

스승의 목소리가 뇌리에 떠오른다.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의 입이 움직이고 있는 이미지. 이어폰에서 무엇인가 들려오는 이미지. 라디오 스피커의 무수한 구멍에서 그것이 들려오는 이미지.

그렇다. 소리는 늘 ‘구멍’에서 들려온다.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움직인다.

타일 한 가운데, 배수구에 은색의 뚜껑이 박혀있다.

변기에서 일어나 몸을 굽혀 그 배수구를 들여 본다. 안은 어둡다. 조명을 등진 내 그림자 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소근……소근……소근…… 

속삭이는 소리는 이 아래서 들려온다.

나는 타일에 손을 대고 배수구에 귀를 댄다. 정면의 하얀 민무늬 벽을 보며.

신경을 바로 아래로 향해, 귀를 기울인다.

…………소근…………소근………… 

멀다. 듣기가 힘들다. 아까보다도 더 멀다.

아무것도 듣치 못한 채, 결국 소리는 사라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뭐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괴이는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괴이였는지조차도 잘 모르겠다. 단지 작은 목소리, 아니, 소리가 들려온 것뿐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깨달음이 떠올랐다.

다시 한 번, ‘세정’ 버튼을 누른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곧 모든 소리가 없어진다. 그리고 들려오는 것이다.

……소근……소근……소근…… 

다시 한번, 배수구에 귀를 댄다.

이번에는 공기의 흐름을, 귀 안쪽에서 확실히 느꼈다.



어떤 구조인지는 모르겠지만, 변기 세정을 하기 위해 물이 흐르면 진동인지 수압인지 때문에 배수구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별 거 아니었다.

어깨의 힘이 쭉 빠진다.

스승도 이런 단순한 전말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별 거 아니로군.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자 웃음이 나 견딜 수 없다. 이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의, 그의 진지한 얼굴이 어릿광대처럼 생각이 된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에 이상한 말을 했었지)

확실히…… 

‘자주 쓰는 귀는 안 돼. 자주 쓰는 귀는, 현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화한 것이니까. 언제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목소리를 듣는 것은, 반대쪽의 귀다.’

바보 같다.

스승의 허세도 갈 때까지 갔구나.

나는 미소를 띠며, 왼쪽 귓불을 만진다. 지금까지 확실히 의식도 하지 않고 오른쪽 귀를 배수구에 대고 있었다. 의식해 본적은 없지만, 오른쪽 귀가 자주 쓰는 귀였던 거겠지.

그렇지만 왼쪽으로 듣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고 하는 거지?

스승을 바보 취급하고 싶은 기분으로, 나는 다시 한 번 바닥의 타일에 양손을 대었다.

아까와 같은 자세다. 입구 문에서 몸을 눕혀 바닥에 엎드린다. 배수구는 화장실 한 가운데 있다. 안쪽에 변기가 있으니까, 엎드릴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스윽하고 왼쪽 귀를 바닥에 향하였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등줄기를 스쳤다.

뭐지, 타일에 닿은 무릎이 떨리고 있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는다. 내 머리는 배수구의 은색 뚜껑에 다가가, 그 구멍에 왼쪽 귀를 딱 붙였다.



아까와 다르다. 오른쪽과 왼쪽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어째서 이런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심장이 아플 정도로 수축하며, 바늘과 같은 한기가 전신을 찔렀다.

지금, 내 앞에는 벽이 없다. 오른쪽 귀를 배수구에 댈 때 있었던 그 하얀 무기질의 벽이, 지금은 없다.

왼쪽 귀로 들으려고 하는 내 눈 앞에는 지금, 세면대 밑 부분과 바닥에 생긴 좁은 공간이 있다. 걸레조차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공간 안 쪽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에서, 누군가의 눈동자가 쳐다보고 있다.

검게 빛나는 안구가, 확실히 이쪽을 보고 있다.

……소근……소근……소근…… 

왼쪽 귀가 속삭임을 듣는다. 지면 안쪽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듯한 소리를.

나는 그 작은 소리를 말로 인식하기전에 뛰어 올라, 문을 열고 밖으로 굴러 나왔다.

문에서 나오는 순간, 흘끔 세면대의 거울이 보였다. 얼굴 없는 나. 그건 정말 나였을까.

뒤돌아보지도 않고 달린다. 골목을 몇 번이고 돈다.

통로를 나왔을 때, 시끄러운, 백화점 특유의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가슴께를 흘러내린다. 지금 본 것이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는다. 나는 벽 가장자리에 있는 벤치 옆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안도를 느꼈다. 아마, 바닥 공간에 있던 그 눈동자를 본 후에, 그 화장실에서 도망쳐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동안, 한순간이라도 ‘이 문은 열리지 않는게 아닌가’라고 생각해버렸다면, 분명 그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게 아닌가, 라는 기분 나쁜 상상.

그런 상상이 솟아오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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