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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괴담

[282th] 혈설

레무이 2017. 6. 2. 22:43

전국적으로 상당한 양의 눈이 내렸다.


내가 살고있는 시골 마을에는 평소에는 별로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굉장하게 내렸다.


그리고, 2년 전, 역시 눈이 엄청나게 내렸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날 나는 2층의 방에서 혼자 자고 있었다.


우리 집은 낙후된 전업 농가이고, 50대 아버지와 엄마와 나까지 3명이 살았다.


아직 새벽이지만, 아래층에서 아버지가 부스럭부스럭 뭔가 소리를 내며 현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나는 이불 속에서 잠결에 듣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 폭설이 온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비닐 하우스가 눈에 눌리지는 않았는지, 아직 어두운 시간에 보러 나간 모양이다.


도시의 샐러리맨들도 힘들겠지만, 이럴 때는 농가도 꽤 큰일이다.


무엇보다, 내 입장에서는 이 빌어 먹을 추위와 친해질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냥 편안히 이불 속에서 계속해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시 후, 집 앞으로 삐걱삐걱하는 빠른 걸음으로 눈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현관이 열렸다 생각하자, 허둥지둥 집으로 뛰어 오르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전화로 "···그 ●● 다리로 구급차! 젊은 여자가 목이랑 손목이든지 잘라 피투성이로···" 라고 외쳤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내가 아래로 내려갔더니, 아버지가 안색을 바꾸며, "다리에서 여자가 목을 잘라 자살을 해서, 빨리 가봐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황급히 스웨터 위에 점퍼를 뒤집어 쓰고 장화에 발을 끼워넣고는 아버지와 함께 여전히 캄캄하고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섰다.


아버지에게 "요령부득*하기 때문에 설명해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걸으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요령부득: 말이나 글의 요령을 잡을 수가 없음. - 구글사전)



내가 생각했던대로, 아버지는 비닐 하우스를 보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고 한다.


비닐 하우스는 우리 집 근처의 개울에 털이 난 정도의 강에 놓인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를 건넌 곳에 있는데,


이 근처는 후미진 시골이라서 가로등은 1킬로에 1개 정도 밖에 없었기에, 밤은 암흑에 가까운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모를지도 모르지만, 후미진 시골에서 밤의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굉장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리 근처까지 왔을 때 그 근처에 홀로 서있는 가로등의 희미한 빛 속에,


다리의 난간 옆에서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가까이가자 그것은 코트를 입은 긴 머리의 여자였다.


아버지는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여자가 괴로워 하는 것으로 보고 걱정하여, "무슨 일입니까?"라고 말을 걸었다고한다.



그 때 아버지가 여자의 발밑을 보자, 눈 위에 끈적끈적한 검붉은 액체가 퍼져있는 것이 보였다.


놀란 아버지가 여자의 앞까지 허리를 숙이고 다가갔는데, 갑자기 여자는 괴로운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얼굴을 들었다.


눈을 치켜뜬 여자의 얼굴은 입 주위와 목 주위가 피투성이인 채로, 오른손에 여성용 면도기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여자는 괴로운듯한 신음 소리를 지르며 그 면도기를 피 묻은 목에 대고, 그것을 단숨에 쭉 하고 끌었다.


김이 나는 거무 칙칙한 액체가 뿜어져 나와서, 여자의 가슴과 발밑의 눈을 물들여 갔다.


아버지는 숨이 막혀오면서도 여성에게서 면도기를 빼앗아 그것을 강에 던지고,


"멍청한 짓 하지 마!"라고 호통을 치고는 서둘러 집까지 구급차를 부르러 돌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둘이서 어둠 속에서 눈에 발을 잡아 끌며 다리에 도착해보니, 가로등의 침침한 조명 속에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이, 어디있는거야"라고 여자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고, 나도 근처의 어둠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기색은 없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여자가 웅크리고 있었다는 가까운 눈 위에는 아버지의 발자국 밖에 없었다.


"강이다"


나는 여자가 강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생각해서, 눈에 파묻힌 제방의 경사면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제방의 아래는 발밑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에 싸여 있었고, 위험했기 때문에 내려갈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구급차가 눈 속을 비집고 도착했고, 또한 주재소의 경찰관도 스쿠터로 넘어질 듯이 왔다.


아버지는 경찰에 경위를 설명하고 하늘도 드디어 밝아오기 시작해서, 구급차 대원과 함께 주위를 찾아 보았다.



하지만 주위에는 무릎까지 오는 강의 다리 아래에도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여자의 발자국도 없었고, 게다가 다리의 눈에는 약간의 혈흔조차 없었다.


날이 밝아오면서 멈출 기색없이 눈 속을 1시간 정도 찾아 봤지만, 여자의 흔적은 무엇 하나 찾아 내지 못했다.



일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급차는 왔던 길을 돌아갔고, 아버지는 경찰과 함께 주재소에 가기로했다.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서, 사정을 다시 들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여서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속까지 차가워져있던 나는 즉시 코타츠에 들어갔고, 그 상태로 방금 전까지의 사건의 경과를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낌새가 좋지 않구나"라고 말하면서 된장국을 만들고 계시다가,


문득 부엌의 창문 밖을 보면서 "어, 그 여자 아니야?"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부엌 창문으로 달려갔지만, 창문에서 보이는 것은 눈발 뿐이었다.


"난 틀림없이 봤단 말이야?"라고 하며 투덜대는 엄마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나는 다시 코타츠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때, 코타츠가 놓여있는 오래된 6장 크기의 창밖으로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쪽을 쳐다보는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는 갸름하고 창백한 얼굴이었고, 머리가 길었으며, 입 주위와 목 주위에 진득하게 피가 붙어 있었다.


나는 몸이 얼어 붙어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되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여자의 얼굴은 사라져 있었다.


황급히 창문을 열어 바깥을 봤는데 여자의 모습도 발자국도 없었다.



나는 망설인 끝에, 주재소에 전화를 걸었다.


부모와 자식이 모두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니냐고 할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내가 본 것이 환상이나 유령이었다 하더라도 본 것은 사실이다.



수화기 너머로 몇 번 통화 연결음이 나고, 귀에 익은 목소리의 경찰이 받았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경찰은 입을 열며 곧바로 "뭐야, 다시 나온거냐?"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위축되어


아버지는 아직 거기 있습니까? 라고만 물었다.


"아버지는 아까 30 분 정도 전에 주재소를 나갔다."라고 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렸다.


30분 전에 나갔다고 하면, 벌써 도착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돌아 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와 둘이서 식은 아침식사를 하며,


"아버지는 바로 비닐 하우스를 보러 가셨을지도..." 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비닐 하우스에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예의 다리까지 왔을 때, 조금 새로운 발자국이 한 사람 분 다리 위에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발자국을 눈으로 쫓아보니, 그것은 다리의 중간에, 바로 그 여자가 웅크리고 있었다고 했던 근처까지 이어졌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 난간에 눈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나는 난간에 다가가 그곳에서 강물을 내려다 보았다.



새하얀 눈의 둑의 사이에 끼인 강,


무릎 정도까지 올라오지 않는 물 속에,


검은 점퍼 차림에 장화를 신은 남자가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나는 제방을 달려 내려가 강에 뛰어 들었다.


엎드려 쓰러져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둑까지 질질 끌어내었지만, 이미 맥도 호흡도 멈추어 있었다.


눈발 속을 바라보자,


강 건너편에는 머리가 긴 코트 차림의 여자가, 입, 목, 가슴의 주위를 피로 새빨갛게 물들이고 서 있었다.


여자는 곧 눈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엄마와 둘이서 아직 이 집에 살고 있지만,


그 이후로 눈이 내리는 날은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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