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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괴담

[419th] 안됩니까

레무이 2017. 9. 25. 17:39

미술계 전문대에 다닐 적에 겪은 이야기.


1학년 1학기는 기초과정이라서, 전공 중에서도 그림이나 색채학 따위를 배웠는데,


이 시기에는 과제가 정말 죽을만큼 많았다.


그리고, 수업에 사용하는 수채화용 패널 따위를 미리 준비해야만 했다.


편도 1시간 반 통학 시간, 아침 6시 등교하고, 알바를 하고는 한밤이 되면 과제를 한다.



그런 생활을 하던 나는, 이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가 역에서 버스 두 정거장 거리쯤 떨어져 있어서, 귀가할 때에 편의점에 들를 겸 걸어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편의점에서 나와 첫 번째 정류장 앞 근처는 주택가였다.


도로 건너편 강변에 조경 업체 사무소가 있었고,


버스 정류장 비스듬히 뒤쪽에는 중장비가 있는 주차장과 돌과 식목이 나란히 있었다.



걸으면서 특별히 의미없이 보도 쪽을 봤더니 바위 앞에 사람이 있는 것이 보였다.


초여름 밤 8시 전, 아직은 살짝 어두워질 정도였고,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라도 피우고 있을 것이다.


흰 티셔츠를 입은, 몸집이 작고 탄탄해보이는 아저씨의 등이다.


'치리리리리리링!'


자전거의 벨 소리에, 나는 뒤쪽에서 오는 자전거를 뒤돌아보고는 약간 피했다.


그대로 자전거가 나를 지나쳐 달려가는 것을 쫓았는데··· 왠지 위화감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아저씨의 등이 없었다.


눈을 뗀 것은 불과 몇 초 정도.


근처에도 아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주차장의 셔터도 딱 내려져 있다.


지나면서 부지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 시점에서 내가 모르는는 사이에 그냥 어딘가에 들어갔거나,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피로도 쌓여 있었고.





저녁 식사와 목욕을 마친 후, 나는 거실에서 물감과 씨름하고 있었다.


책상에는 큰 패널과 재료를 늘어놓을 수 없으니까, 테이블에서 작업하는 일이 많다.


일단 거실로 나와 북쪽 복도에 접한 2개의 방이 부모님의 방과 나의 방이었고, 거실과 더불어 일본식이었으니까,


거실과 내 방을 왕복 해도 먼저 잠들어계신 부모님께 폐를 끼칠 걱정도 없었다.



자정이 지난지 꽤 지났을 무렵.


테이블을 향해 있었는데 복도로 이어진 문이 오른쪽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창살에 유리가 들어간 문 너머에는, 부모님이 주무시는 시간이라 깜깜할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아까부터 살짝, 살짝 움직이는 것이있다.


얼굴을 돌려서 바라보면, 그것은 확 사라졌다.


신경쓰인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복도에서, 확실히 뭔가가 움직이고있다.


쳐다보면 숨는다.


손은 계속해서 작업하면서 은근히 시선만을 돌려보았다.




!!!



심장이 뛰었다.


유리 너머의 어둠속에, 칙칙한 피부색의 손이 있었다.


슬쩍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가··· 망설이면서, 레버형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또 그 옆에는 당연히 손의 주인의 어깨가 보이고 있다.


티셔츠. 둥근 어깨. 흰색. 옷깃에서 보이는 목이 살짝.


평정을 가장하고는 작업을 계속하는 나의 시야의 구석에서, 그 녀석은 모습을 엿보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불현듯 머리가 내려왔고······







탱탱 부은 얼굴의 아저씨가 생기없는 공허한 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으 아 아 아 아 아 아 아!"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사실, 그런 목소리는 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웃의 잔소리도 없었고 부모님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지만, 목에서부터 목소리를 짜내어, 나는 선언했다.




"환각이 보인다! 이제 진심으로 위험하잖아! 나는 잠을 자야겠어!"




물감도 패널도 내버려두고 거실에도 주방에도 불을 켜놓고는.


나는 내 방에 들어가서, 미닫이 문을 세차게 닫았다.


방의 전등도 물론 켜 놓았고, 방에서 다락형 침대에 기어올라 담요를 덮었다.


내가 내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주변은 잠잠하고 고요했다.


기분 탓이야, 밤샘이 계속되니까 내가 어떻게 된거야···


이렇게 되뇌이고 있던 그 때.







"···안됩니까."





내 방의 문 앞에서, 분명하게 들렸다.


물론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닌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집안은 조용해졌다.




나는 결국 환해진 방에서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고, 밖이 밝아진 뒤에야 거실을 살짝 내다보았다.


물론 아무도 없었고, 복도의 정면에 있는 현관도 잠겨있었으며, 체인도 걸려있다.




다만, 거실과 복도를 나누는 문 만이 조금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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