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번역 괴담

[464th] 노트

레무이 2017. 11. 14. 00:59

짐을 정리하기 위해서 더운 여름날에 오래간만에 외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외할아버지 댁이라고는 해도 그 집은 이미 아무도 살고있지 않았기에 나 홀로 하는 작업이며, 쓸데 없을 정도로 넓은 집이라서, 좀처럼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특히 이 집에서 가장 넓은 방에는 큰 불단이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지 투성이였던 그 불단을 이동시켜야 했지만, 지나치게 더러워진 상태를 보고는 별로 사용하지 않은 걸레로 주위를 정성스럽게 닦고있던 때 였다.


불단과 벽 사이에 압정이라거나, 잡다한 쓰레기가 일부 끼어 있었는데, 그 어두운 틈새에 한 권의 노트가 끼여있는 것을 알아챘다.


무거운 불단을 혼자 지탱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손을 넣을 정도의 틈새를 만들어 손을 내밀어 노트를 꺼내었다.


상당한 세월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흙빛으로 변색되어 있거나, 주름져 있는 등 어떻게 봐도 조심스레 다뤄진 것은 아니다.


눈길을 끈 것은 군데 군데 검붉게 변색 된 부분이었다. 그 얼룩은 표지뿐 아니라 표지를 넘긴 가운데에도 있었다. 순간, 이것은 오랜 세월에 변색 된 혈액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게다가 이것은 마치 혈액에 흠뻑 젖어있던 것 같은 얼룩의 모양이었다.


몹시 불쾌한 기분, 혹은 정체 모를 기분나쁨을 느꼈지만, 흥미삼아로 페이지를 넘겨 간다.


안쪽에는 먹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문자가 되지 않은 복잡한 선과 의미 불명의 그림, 그리고 검붉은 얼룩으로 채워져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10살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90은 넘으셨을텐데, 몸도 약하고 치매도 있어서 어느 시설에서 보내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걷지도 못하고 노쇠 하여 죽음을 기다릴 뿐. 말도 없이 일어났는지 자는지의 구별도 어려운 정도다. 나는 더이상 제대로 문병도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댁은 내게 나름의 생각이 있었지만, 더 이상 할머니도 이 집에 돌아올 이유도 없었기에 처분해야 하는 일이 되었고, 그에 앞서 내가 짐 정리를 맡게 된 것이었다.



노트에 대해서 어머니에게 물어볼지 생각했지만, 이런 기분나쁜 물건을 가족에게 묻는다는 사실에 주저했다. 가족이기에 모르는 편이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긴 있었다. 근처에 안면이 있는 할머니가 있는데, 역시 상당한 고령이었지만,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밭일을 하는 탄탄한 모습의 인물이다. 옛날부터 이 땅에 살고 계시고 내가 어렸을 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만나면 인사는 꼭하고 있었고, 아마도 뭔가 알고 계실 것이다.



해가 기울어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을거라는 적당한 시간에, 할머니의 집을 방문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잘 기억하고 계셨고 할머니의 근황과 함께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노트를 보이자 역시 불쾌한 느낌이 들었고, 할머니도 짐작가는 것이 없다는 듯 했지만, 잠시 바라보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의 부모, 즉 나의 증조부모는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양친 모두 돌아가셨고, 또한 슈지라는 동생도 있었다.


슈지는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불편했다. 평범한 대화조차도 불편했고, 그것에 따른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불명이지만, 정신적으로도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고한다.


할아버지는 슈지를 혼자 키우고 있었지만, 커뮤니케이션이 통하지 않기도 했고, 기행이 눈에 띄게 되자 눈을 뗄 수 없어서 직장생활도 힘들게 된 생활로 점차 지쳐갔다고 한다.


슈지는 집에 갇힌 상태에서 생활했고, 자신의 의사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트를 적었다고한다.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슈지는 당시 기르던 닭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낫으로 죽인 후 자신의 귀에 젓가락을 깊게 찔러넣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젓가락은 귀를 꿰뚫고 망치로 두드린 것처럼 두개골을 관통하고 뇌까지 도달했다.


귀는 물론 눈, 코 등의 부위에서 엄청난 출혈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증언에 따라 슈지는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스스로 원한 자살이었는지, 정신 이상으로 자살했는지, 타살, 즉 할아버지가 죽인 것은 아닌지 당시 동네에서 소문이 돌았다고한다.


즉,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 노트북은 슈지의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루가 저물었고, 할아버지 댁에 돌아온 나는 이 노트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했다.


한동안 낯선 육체 노동의 피로가 몰려왔고, 내일이라도 상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노트를 머리맡에 놓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곧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잔 것일까. 소리를 눈치채고는 눈을 떴다.


"부스럭부스럭··· 바각바각···"


그런 소리 였을 것이다. 뭔가가 기어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옆 머리맡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생기의 따뜻함도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눈이 익숙해져서야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슈지의 노트, 그 노트에서 길쭉한 팔이 위를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식물이 자연적으로 자라난 것 처럼, 그 팔은 팔꿈치를 굽혀 다다미를 쥐어 뜯고있었다.


"부스럭부스럭··· 바각바각···"


손톱을 세워 다다미를 긁는 소리였다.


"으···.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이불에서 뛰쳐나왔는데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설려고 해도 설수 없었다. 구르는 것처럼 구석으로 달아났다.


느낀 적이없는 공포로 혼란스러웠지만, 그 팔의 행방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팔은 방금 내가 자고 있던 베개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 노트에서는 두 눈이 엿보이고 있었다.



서서히 머리 전체가 보였는데,


"오오··· 오···"


입에서 단어가 되지 않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뭔가가 입 근처에서 토해졌다. 아마 피가 아닐까.


그 쯤에서 나의 기억은 끊어졌다.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깨어나 보니 몸에 익숙한 침대였다. 누군가가 옮긴 것일까.


친가에 돌아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어머니가 계셨다.


"무슨 일이 ···라니"


"아무 일도 없었어?"


이렇게 묻는 어머니의 표정을 봤지만, 그 밤의 사건을 증명하는 흔적, 혈흔이나 다다미를 긁어댄 흔적을 어머니는 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 노트···


"방에 노트 있지 않았어?"


물어봤다.


"아무것도 없었어. 연락이 없어서 걱정되어서 가봤더니 쓰러져 있었으니까 걱정하는거야."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꿈이었을까? 현실이었을까? 다시 가서 확인해야한다.


피로는 있었지만 몸에는 이상이 없어보였다. 그날은 그대로 아침까지 집에서 쉬고 다음날 다시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머니와 함께였다.


내가 잠들었던, 그리고 도를 넘는 공포로 정신을 잃은 그 방에는 노트나 혈흔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이불은 어머니가 정리하셨다고 한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어머니의 도움으로 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반년이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거동이 불편해지고 나서부터 나도 어머니도 마음의 어디엔가 각오를 했기때문에 그다지 슬프지도 않았고, 장례는 할아버지 댁에서 치렀다.


그때의 기묘한 경험은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죽음으로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자 다시 생각나버렸다.


문득 노트를 보여드렸던 할머니에 대해 떠올랐다.


그 할머니에게 노트를 보여드리고 상담한 것을 완전히 잊어 버리고 있었던 나는, 그 할머니께 다시 얘기하고 진위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친분이 있는 할머니이기 때문에 물론 장례식에 오실 것이다. 만약 오지 않으셨다해도 근처니까, 찾아뵈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둘러봤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인근에 밭일했다 할머니 있었지? 그 할머니 오늘 안오셨어?"


그러자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 그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 몇 년 전이었으니까. 5년전 정도였나. 장례식에는 가보진 않았지만, 확실히 그랬어."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는데, 계속해서 이어진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이웃 모두 알고있을텐데, 그 할머니는 지병이 있었고, 자살이었던 모양이야. 비참하게 돌아가셨다는데, 두 귀에 젓가락을 찔러서 사망했다고 하더라··· "




슈지와 그 할머니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 노트는 무엇이었던 것인지, 그것은 결국 알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집을 다시 가보았는데, 그 집은 이미 철거된 상태였습니다.

'번역 괴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466th] 지옥 버스  (0) 2017.11.16
[465th] 책상의 구멍  (0) 2017.11.15
[463rd] 비겁한 방법  (0) 2017.11.12
[462nd] 어머니의 이야기  (0) 2017.11.12
[461st] 이상한 인형  (0) 2017.11.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