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일 때, 출석은 안 해도 레포트만 제출하면 최소한 pass는 시켜준다고 하는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좋아라하며 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레포트 제출시기가 되면 “왜 이런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라고 짜증이 났다. 최근의 대학생은 이런 건가라며 자기일이면서도 한심하다.여하간, 언제인가 대학부속도서관에 참고자료를 찾으러 갔다.ID카드로 지나갈 수 있는 게이트를 통과해, 어째서 모두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학생이 붐비는 도서관을 어슬렁거렸다.이렇게 어두웠던가.문득 생각한다.아니, 높은 천장에 달려있는 조명이 밝게 도서관 안을 비추고 있었다.눈을 비빈다.향토자료가 놓여있는 어느 부분만이 빛의 양이 이상하다. 묘하게 어두운 느낌이 든다. 위를 보아도 형광등이..
덥다.견딜 수 없어져서 상의를 벗어, 허리에 묶었다.한숨 돌리며 산길을 돌아본다.숲길이 여러 번 꺾어지면서 산자락으로 이어져있다. 아래쪽에 방금 내린 버스 정류장이 보일까 싶었지만, 키가 큰 삼나무 숲에 가려져버렸다.오른 손에 꽉 쥔 종이가 땀으로 연해져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집을 나올 때 오늘은 추워질 것 같다고 생각해 그 나름의 복장을 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강한 햇볕과 산길의 경사가 평소 운동부족인 신체를 뜨겁게 만들었다.“좋았어.”어차피 혼자다. 누가 재촉하는 건 아니지만 빨리 움직이려고 하였다.발을 내딛는다.그 때, 멀고 높은 하늘로부터 물줄기가 하나 뺨에 떨어졌다. 놀란다.산 날씨는 변하기 쉽다고 하지만,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도 없다. 하늘을 나는 새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대학 3학년의 봄. 드디어 모든 대학 강의에 출석할 의욕을 잃은 나에게 아르바이트와 도박은 이전보다 더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도박이라고 해도, 경정이나 경륜같은 아저씨들이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보다 더 정보를 얻기 쉽고 학생들 사이에서 관심도 높았던 경마, 그리고 가볍게 할 수 있는 마작이나 파칭코였다.특히 파칭코 이벤트가 있는 날은 왜인지 모르게 감기에 걸려 바이트를 갑자기 쉬게 된다는 실로 민폐인 체질을 발휘하여, 아르바이트 동료한테 들키지 않도록 슬쩍 다니거나 했다.어느 날, 소원해지고 있었던 오컬트 쪽 스승과 갑자기 만나게 되었다. 역 근처의 거리에서였다. 저녁에 역 앞에서 라면을 먹고, 자 이제 다시 한 판 더, 라고 의욕이 솟아오르던 차였다. “첫 월급이 나왔어”라고 기쁜..
그러나 지금의 내 속에는 그 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한번 반복했다.울고 있는것 같았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누가? 내가? 왜?“진정해. 꿈이라니, 네 꿈이냐는 말이야? 그렇다면 달라. 왜냐면…”아루쿠씨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입 안에서 다음 말을 천천히 음미했다.“우선 내겐 자아가 있어. 내 의지로 지금 말하고 있어. 이게 네 꿈이라면 계속 되고 있는 나의 의식이 네 머리속에서 태어나고 있다는게 되잖아? 그런 무서운 일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볼 꼬집어 봤어?”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꼬집는거보다 아픈 꼴을 당한거 같네”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봤다.“이건 꿈이죠”“그러니까, 아니라고. 꿈이 아냐.”“이건 꿈이죠”“대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이건 꿈이죠”“아니라고 했지? 꿈..
덤불나무을 지나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내는 음영을 빤히 관찰하며 천천히 나아갔다.기묘하게 조용했다.단단한 지면에 작은 돌이 구르고 있어 내 발이 그것을 걷어차는 소리가 울려퍼졌다.덤불 앞에는 나무 벤치가 두 개 늘어선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누군가 있을것 같아 목을 뻗어 내다보았지만 멀찍이서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공원이 아니었나 싶어 머리 속에 주책가 지도를 떠올리려고 할 때, 그 아무도 없는 벤치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긴장해서 다시 한 번 시선을 던졌다.두 개의 벤치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 건너편은 전망이 좋아 아무도 숨을 수 없을 터였다. 뒤의 덤불나무 속이라면 모르지만, 뻔히 보기에도 딱딱해 보이는 나무였다. 그 속에 숨는다는 것은 상당한 상처를 입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될..
대학시절 어느 가을의 이야기다.아침밤으로 쌀쌀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한 여성과 함께 오컬트 스승의 집을 습격했다.주변의 주택들은 정적에 감싸인 한밤 중이었다. 아파트 방에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하고 발 소리를 죽여 현관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돌리니 쉽게 문이 열렸다. 문이 잠겨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슬금슬금 캄캄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스승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둘은 눈짓을 한 뒤 준비한 로프를 능숙하게 이불 아래 깔고 신중하게 준비했다.그리고 단숨에 로프를 잡아당겨 이불채 동여맸다. “뭐,뭐!” 스승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짧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렇다할 저항도 없이 우리들 앞에 그야말로 멍석말이 상태로 놓여졌다. “뭡니까?” 잠기운도 달아났는지 스승은 냉정한 어조로 겨우 그..
이야기를 끝낸 소녀가 숨을 삼키는 것처럼 작은 소리를 냈다. 오싹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녀의 이야기 대로라면, 조부의 사인은 토사물이 목에 막혀 질식사한 것이겠지. 그 모습을 볼 때, 그 시점에서 사망했을 것은 확실하다. 그 시체의 목에서 소리가 나고, 두고 나온 주머니는 사라지고 장롱은 원래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런 일로부터 도출되는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도 으스스한 상상뿐이었다. 만약 조부가 살아있었다면, 그녀는 그 눈 앞에서 그를 살리려고도 하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던 유품인 반지를 훔쳤던 것이다. 그 후, 머지 않아 정말로 숨이 끊어져버릴 조부의 임종에, 터무니 없는 나쁜 짓을 해버린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조이는 듯 아팠다. 그리고 만약 조부가 처음부터 죽어..
소녀는 그 어두운 복도가 싫었다.기분 나쁜 곰팡이 냄새가 벽이나 바닥에 찌들어있는 것 같아서 항상 숨을 참고 그곳을 지나갔다.그 복도 끝에는 할아버지의 방이 있었다. 소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거기서 누워있었다.다리가 안 좋다고 들었지만, 왜 안 좋아졌는지는 모른다.예전에는 목수의 동량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해줬기 때문에, 아마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방에 찾아가면,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기뻐하면서 얘기를 해주시거나 과자를 주시거나, 가끔은 용돈을 주시는 일도 있었다.그런 걸 엄마한테 들키면 혼나는 것은 할아버지였다.그래도 "요즘 며느리는 말버릇이 돼먹지를 못했어" 하면서 투덜투덜거리며 기죽지 않고,그런 일이 있는 밤이면 아프다 아프다 하고 소란을 피우며 기분이 풀릴..
대학교 1학년 봄이었다.그 무렵 나는, 예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었던 유령 따위의 오컬트 이야기와 관련해서,독특하고 강렬한 개성을 흩뿌리던 동아리 선배에게 심취해 있었다.아니, 심취라고 하기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걸 봤다, 는 것 같은 것이었을까.스승이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던 그에게서,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별을 보는 소녀를 보고 와」별을 보는 소녀?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금방 그런 이름의 괴담을 떠올린다. 괴담이라고 하기보다도 도시전설 종류일 지도 모른다.「어디로 가면 되나요」라고 물어봤지만, 대답해주지 않는다.무언가의 테스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힌트는 주지 않겠다는 건가.「알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거리로 나왔지만, 지방에서 올라와 대학에 막 입학한 참이라 근처 지리도 잘 모른다. 커..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미술 시간에 '자신의 가족을 그려라'는 과제가 나왔다.다들 이야기를 하면서 색연필로 도화지 가득 그림을 그렸다.들판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자애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 있는 그림.미끄럼틀 같은 것을 타고 놀고 있는 어린애 둘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있는 그림.아버지와 어머니 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함께 늘어서 있는 그림.기르고 있는 고양이나 개도 함께 그리고 있는 아이가 많았다.그 연배의 아이들은 애완동물도 가족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리라.수업이 끝나고 다 그린 작품을 하나하나 보고 있던 선생님은 문득 어떤 아이가 그린 그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것은 반에서도 어른스럽고 눈에 띄지 않는 남자아이가 그린 것으로, 겉보기에는 여러가지 색의 색연필을 풍부하게 사용해 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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